선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두셨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진단받은 병명이 낯설고 두렵습니다. 오랫동안 기도해 온 일이 최악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럴 때 신앙의 언어들은 종종 공허하게 들립니다. "다 뜻이 있으시다"는 말이, 지금 이 순간에는 위로보다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은 고난 앞에서 억지 미소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가장 긴 책 중 하나인 욥기는, 이유 없이 고통받는 한 사람의 절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시편의 3분의 1가량은 탄식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애써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 절규는 훗날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그대로 외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마태복음 27:46). 우리가 던지는 "왜"라는 질문을, 하나님의 아들도 똑같이 던지셨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설명하기보다,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독특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어떤 세계관도 신이 인간의 고통 속으로 직접 들어와 함께 아파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이 고난을 멀리서 지켜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난을 몸소 짊어지신 분임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문에 답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욥도 끝내 "왜"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듣지 못했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 자신을 만났고,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욥기 42:5).
탄식을 허락하기. 슬픔을 억누르고 믿음이 좋은 척하지 마세요. 시편처럼 정직하게 하나님께 아프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설명보다 임재를 구하기. "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도, 지금 함께 계셔 달라고 구할 수 있습니다.
혼자 있지 않기. 고난은 혼자 짊어지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곁에 있어줄 사람과 함께 이 시간을 지나세요.
하나님의 선하심은 고난이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함께하신다는 약속에서 드러납니다.